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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 타잔 박흥숙 여동생 가족 나이 고향 부인 아내 결혼

seoulsi 2020. 11. 6. 00:47

검사가 되기 위해서 매일 20시간 공부하며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박흥숙은 어떻게 살인범이 될지 다뤄졋습니다. 2020년 11월 5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무등산 타잔'이란 별명으로 불린 살인범 박흥숙의 이야기를 소개했답니다.

 

박흥숙(1954~1980, 고향/출생지 전남 영공군)은 1977년 전남 광주 무등산에 위치한 자신의 무허가 움집을 철거하러 온 구청 직원들을 살해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뒤에,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진압되고 얼마 안 돼 사형 당한 인물이랍니다. 박흥숙은 12살 나이에 아버지와 형을 잃고 어머니, 외할머니, 세 명의 동생 등 여섯 식구의 가장이 됐답니다.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던 박흥숙은 중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했지만 학비를 낼 돈이 없어 진학을 포기했답니다. 그는 중학교에서 받은 교과서를 팔아 번 돈으로 가족들과 함께 전남 영광에서 광주로 갔답니다. 1971년 경에 14살의 박흥숙은 광주로 오자마자 철공소에 취직했던 상황이지만 집을 마련할 돈이 없어 가족들과 함께 무등산의 빈 움막에서 살았답니다. 1년 뒤 움막에서 쫓겨난 박흥숙은 가족들과 뿔뿔이 흩어지게 됐으며, 홀로 무등산에 남아 가족들과 함께 살 움막집을 직접 짓기 시작했답니다.

 

박흥숙은 집안을 일으키겠다는 일념으로 중·고등학교 검정고시를 통과한 뒤 사법시험을 준비하기로 했답니다. 그는 하루에 20시간 이상을 공부하며 사법시험 합격을 간절히 바랐지만 아쉽게도 1차 시험에 불합격했답니다. 검사를 꿈꾸던 박흥숙은 계속해서 공부를 이어갔던 상황이지만, 지난 1977년 그의 상황은 나쁘게 흘러갔답니다. 무등산에 지은 무허가 움막집을 철거하기 위해 구청 직원들이 찾아온 것이랍니다.

당시 무등산이 도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케이블카가 설치될 예정이었답니다. 아울러 6개월 뒤 광주에서 전국체전이 개최돼 박정희 대통령이 헬기 시찰에 나설 예정이었답니다. 광주시 공무원들은 박흥숙을 비롯한 무등산 움막집 주민들에게 철거 사실을 알렸던 상황이지만 갈 곳 없던 박흥숙은 계속 무등산에 남았답니다. 공무원들은 박흥숙에게 밖에서 보이지 않도록 땅굴을 파라고 했는데, 박흥숙은 철거를 피하기 위해 땅굴을 파기 시작했답니다.

 

1977년 4월 박흥숙의 움막집에 철거반원들이 찾아와 철거 작업을 진행했답니다. 이때 철거반원 중 한 명이 움막집에 불을 지르라고 지시했답니다. 깜짝 놀란 박흥숙은 지붕 위에 올라가 천막을 걷으며 불은 지르지 말아달라고 애원했답니다. 철거반원은 불을 지르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이는 거짓말이었답니다. 박흥숙과 가족은 움막집과 더불어 천장에 숨겨뒀던 현금 30만원을 철거반원이 지른 불에 모두 잃고 말았답니다.

 

박흥숙은 괴로움을 참고 다른 움막에는 불을 지르지 말아달라고 다시 부탁했답니다. 하지만 노인이 살던 다른 움막집에도 불길이 타오르는 걸 발견하고 "세상이 우리를 정말로 개돼지만도 못하게 취급한다"고 외치며 울분을 쏟아냈답니다. 흥분한 박흥숙은 산짐승을 잡기 위해 쇠파이프로 만든 딱총으로 공포탄을 발사한 뒤에 철거반원 5명을 제압해 끈으로 몸을 묶었답니다. 극도로 흥분한 박흥숙은 그 자리에서 망치를 휘둘러 4명을 *였답니다.

 

해당 사건이 일어나자 광주시 측은 몰려온 기자들에게 불을 지른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요청했으며, 결국 박흥숙은 언론 보도에 의해 무등산 사이비촌에서 활동했던 사이비 종교에 빠진 괴력의 소유자로 광주 시내에 집이 3채나 있는 인물로 바뀌었답니다. '무등산 타잔'이란 별명도 이로 인해 붙여진 것이랍니다. 한편 그는 미혼이기에 결혼 부인 아내 배우자 와이프 등은 사실이 아니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