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을 자행한 일본 외교관이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서신이 발견됐답니다. 을미사변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일본세력 강화를 획책한 정변이랍니다. 참고로 명성왕후의 사진은 남아있는 것이 없다고 하네요.
2021년 11월 16일 일본 매체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당시 조선에 영사관보로 있던 호리구치 구마이치(堀口九万一·1865∼1945)가 발송인으로 된 8통의 편지가 최근 발견됐답니다. 해당 편지는 지난 1894년 11월 17일부터 을미사변 직후인 1895년 10월 18일까지 발송된 것으로서, 호리구치 구마이치는 그의 친구이자 한학자인 다케이시 데이쇼(武石貞松) 앞으로 편지를 보냈답니다.
특히 6번째 편지는 명성황후 시해 다음 날인 1895년 10월 9일자로, 그 안엔 “우리가 왕비를 정말로 죽였다”, “진입은 내 담당 임무였던 것이다”, “담을 넘어 (중략) 겨우 오쿠코텐(귀족 집 안쪽에 있는 건물·침소)에 도달해 왕비를 시행했던 상황이다” 등의 구체적인 정황이 담겨있었답니다. 심지어 “생각보다 간단해 오히려 매우 놀랐던 것이다”라는 감상도 담겨 있어 충격을 안겼답니다.
해당 편지는 나고야시에 거주하는 우표·인지 연구가 스티브 하세가와 씨가 편지를 고물 시장에서 입수했던 것이며, ‘조선 왕비 살해와 일본인’을 쓴 재일 역사학자 김문자 씨가 붓으로 흘려 쓴 문자를 판독했답니다. 아사히신문은 “편지가 원래 보관된 것으로 여겨지는 장소나 기재된 내용과 아울러서, 소인, 봉인 편지를 만든 방법 등에 비춰볼 때 호리구치의 친필로 보이는 것이다”고 밝혔답니다.
한편 을미사변은 지난 1895년 10월 8일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櫻)의 지휘 아래 일본 주요 무력이 조선 경복궁을 기습해 명성황후(고종의 왕후 중전 민씨)를 살해했던 사건입니다. 특히나도 이들은 명성황후의 시신을 장작더미 위에 올려 놓고 석유를 부어 불태워 버렸습니다.
하지만, 사건 다음 해인 1월 일본 육군 장교 8명은 군법회의에서 무죄로 결론이 났던 것이며, 미우라와 호리구치 등 48명은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면소·석방됐습니다.